공유로 연결된 마음들
하루 종일 저작권이니 음반산업이니 하는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나누던 사람들이, 행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가 초대한 해외 연사들에게 코리안 BBQ를 제대로 보여주겠다며 행사장 옆 마당에 불판을 펴고 익숙한 동작으로 고기와 김치를 불에 올렸다. 그 순간 뭔가를 확실히 알았다. 이 사람들, 보통이 아니구나.
그게 2009년이었다. CC 코리아가 처음으로 사무국을 꾸린 시기였고, 마침 첫 행사로 ‘하우 투 오픈 비즈니스’(How to Open Business) 세미나를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인사를 나누다가 어느새 국제 행사 통번역을 맡고 있었다. 번역사였으니 때마침 쓸모가 있었던 것이고, 뭘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그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 불판 앞에서,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사실 내가 CC를 처음 알게 된 건 그보다 조금 전, 로렌스 레식의 TED 강연을 보고 나서였다. 번역가로 살면서 저작권이라는 것의 이중성과 모순에 늘 의문을 품고 있던 나였다. 순수한 창작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왜 누군가의 창작물은 그토록 철저히 독점되어야 하는가. 그러면서도 창작자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지 않는가. 그 복잡한 고민들 사이에서 CC는 “내 말이 절대 진리”라고 선언하는 곳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함께 찾아나가는 태도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그렇게 CC는 나에게 어떤 선언이 아니라 태도였다.
그런 면에서 CC 코리아의 다른 발룬티어들과 책을 함께 번역하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각자 생계로 바쁜 자원봉사자들이 주말마다 모여 서로 진도를 독려하고, 투덜대고, 피어리뷰를 해가며 끝을 냈다. ‘열린 정부 만들기’와 ‘참여와 소통의 정부 2.0’, 두 권이 그렇게 나왔다. 전문 번역사로서 혼자 하는 작업에 익숙했던 나에게, 그 시간은 서로 다른 시각이 부딪히고 섞이는 낯설고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 경험이 씨앗이 되어, 몇 년 후에는 혼자 데이빗 볼리어의 ‘공유인으로 사고하라’(Think Like a Commoner)라는 책도 번역하게 됐다. 오래 고민해오던 커먼즈에 관한 책을. 지금 다시 보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아 부끄럽지만, 여전히 가장 마음이 가는 번역이다.
그리고 2010년, 서울에서 CC 아시아 서밋이 열렸다. 아시아 각지에서 사람들이 왔고, 오랜만에 만난 이들이 서로 부둥켜 안았다. 초기 iCommons 시절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몰랐지만, 그 포옹들 속에서 이건 보통 네트워크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특히 아시아는 언어 장벽에 커뮤니티도 각자 작다 보니 서로 소통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서울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게 서로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자리인지 실감했다.
특히 바셀을 만났던 때는 잊을 수 없다. 시리아에서 무사히 올 수 있을지 마지막까지 불투명해 조마조마했었는데 극적으로 그가 행사장에 나타났을 때, 돌고 돌아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빛만은 반짝이던 그, 그런 그를 부둥켜 안고 감동해하고 장난치던 CC 아시아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경험들이 쌓여 2013년부터는 CC 아시아 태평양 지역 코디네이터로 일하게 됐다. CC 코리아라는 커뮤니티에서 시작해, 아시아로, 전 세계로. CC는 내가 만나는 세계를 넓혀준 통로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지금은 비록 CC를 떠나 있지만, 번역과 창작을 이어가는 지금도 그때 CC를 통해 몸에 밴 열린 눈과 열린 태도는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때 마당의 불판 앞에서 처음 알아버린, 이 커뮤니티에 대한 애정도.